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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août 2018 6 11 /08 /août /2018 20:11

얼마전 일본당국은 2019년부터 고등학교들에서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내용의 교육을 의무화한다는 학습지도요령리행조치를 고시하였다.

이보다 앞서 채택된 학습지도요령해설서는 독도가 《일본의 고유령토》이며 《불법적으로 점거》되여있다고 서술하고있다.

이에 따라 일본의 고등학교들에서는 독도를 《다께시마》로 표기하여 《일본고유의 령토》로 가르치는 교육을 2019년부터 정식으로 시작하게 된다.

더우기 엄중한것은 학습지도요령이라는것이 교수용참고서로서 과정안에 반드시 반영하게 되여있는 법적구속력을 가진 정부의 교육지침이라는데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는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이 력사적사실을 뒤집는 파렴치한 력사외곡행위이며 날강도적인 령토강탈행위이라고 인정하면서 이를 준렬히 단죄규탄한다.

력사적사실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독도는 우리 인민이 천수백년전부터 개척하고 령유해온 조선의 고유한 섬이며 일본의 력대 봉건정부들도 독도의 조선령유권을 거듭 인정해왔다.

일본이 《독도령유권》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1905년 독도《시마네현편입》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일제의 조선강점정책의 범죄적산물로서 완전히 불법무도한 령토강탈행위였다.

그런것으로 하여 일본의 전후령토처리과정에 독도는 폭력과 탐욕으로 략취한 지역으로 규정되여 일본령토에서 명백히 제외되였다.

오늘날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결국 일제의 령토강탈행위를 합법화, 정당화하는 군국주의부활책동이며 용납 못할 반력사적망동이다.

우리 공화국의 력사학자들은 천년숙적인 일본이 과거식민지범죄에 대해 사죄와 배상은 고사하고 파렴치한 령토강탈행위에 광분하고있는데 대해 경종을 울리며 새 세대들에게 외곡된 력사인식과 군국주의를 고취하는 그릇된 결정을 즉시 철회할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독도는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영원히 조선의것이다.

 

주체107(2018)년 8월 9일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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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novembre 2017 7 12 /11 /novembre /2017 17:40

올 들어 잇따라 소설화된 사회주의 혁명가 주세죽
최근 자필 기록 ‘이력서’ 발견돼 오류들 정정 기회

주세죽은 3·1운동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였다. 1921년 중국 상해, 1925년, 1928년 9월, 1929년 8월, 1938년 무렵, 1945년의 주세죽(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임경석 제공

주세죽은 3·1운동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였다. 1921년 중국 상해, 1925년, 1928년 9월, 1929년 8월, 1938년 무렵, 1945년의 주세죽(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임경석 제공

주세죽(朱世竹)이라는 여성이 있다.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지났으니 역사 속 인물이라 할 만하다. 그는 잊힌 인물이었다.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했는데도 그랬다. 마땅히 남과 북 어디선가는 그의 삶을 되돌아보고 기억해왔을 법한데도, 그 존재는 잊혀져왔다.

남한에서는 이념적인 금제 탓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줄곧 국가 이념(이데올로기)으로 작동해온 반공 이념 때문이었다. 주세죽은 사회주의자였다. 3·1운동 참가자였고, 그 직후에 물밀듯이 몰려온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삶이 공론장에 떠오른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일이다. 민주주의적 권리와 언론 자유가 확장된 조건 속에서 역사에 복귀할 수 있었다. 비로소 활자로 그의 이름을 만날 수 있게 됐다.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1996년)에 ‘주세죽’ 항목이 수록됐고, 2004년에는 그의 굴곡진 삶의 편린이 기록된 <이정 박헌영 일대기>가 출간됐다. 2007년에는 정점을 찍었다. 한국 정부가 고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영화로도 만들어질 주세죽의 삶

최근 발견된 ‘이력서’라는 제목의 6쪽짜리 필기체 문서. 사료적 값어치가 높은 이 기록은 그동안 잘못 알려진 사실을 정정할 가능성을 준다. 아래 작은 사진은 ‘코레예바’라는 주세죽의 러시아어 서명.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최근 발견된 ‘이력서’라는 제목의 6쪽짜리 필기체 문서. 사료적 값어치가 높은 이 기록은 그동안 잘못 알려진 사실을 정정할 가능성을 준다. 아래 작은 사진은 ‘코레예바’라는 주세죽의 러시아어 서명.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올 들어 더욱 이채로운 일이 일어났다. 주세죽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 연이어 발간되더니, 그 작품들이 나란히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올봄에 <코레예바의 눈물>(동하출판)을 쓴 손석춘 작가가 제2회 이태준문학상을 받았다. 코레예바는 주세죽이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쓰던 이름이다. 가을에도 수상작이 나왔다. 주세죽과 그의 두 벗의 삶을 문학적 상상력에 의거해 형상화한 <세 여자>(한겨레출판사)가 발간됐다. 이 책을 지은 조선희 작가는 요산김정한문학상 제34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11월2일 부산일보사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놀랍다. 오랫동안 망각 속에 잠겨 있던 인물이 이처럼 급격히 떠오르다니 말이다. 주세죽의 삶이 문학의 매력적인 소재로 떠오르고 있는 양상이다. 따지고 보면 이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그는 문학작품의 소재가 된 바 있다. 1930년 신문 연재소설 형식으로 발표된 심훈의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이 있다. 주세죽을 모델로 한 문학작품으로는 아마 첫자리를 점할 것이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 생각난다. 16세기 프랑스 농촌의 한 가정에서 일어난, 가짜 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다양한 방식으로 유럽과 미국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이야기는 소설·희곡·오페레타·영화·뮤지컬 등의 형태로 수백년간 반추돼왔다. 1981년에는 프랑스 영화감독 다니엘 비뉴가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1983년에는 미국의 역사가 내털리 제이먼 데이비스가 같은 제목의 역사책을 출간했다. 미시사 연구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그 책은 역사 연구자들에게 지금도 마르지 않는 영감을 주고 있다.

머지않아 주세죽의 삶이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문학에 이어 영화가 뒤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의 삶이 문학과 예술의 여러 장르를 통해 다양하게 반추되는 현상을 보게 될 것만 같다. 그러기를 바란다. 비극적인 삶을 견뎌야 했던 그의 영혼에 따스한 위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주세죽의 자필 기록이 발견됐다.① ‘이력서’라는 제목의 6쪽짜리 필기체 문서다. 직접 펜을 들고 잉크를 찍어서 쓴 것이다. 일제강점기 옛 맞춤법에 따라 쓴 국한문 혼용의 글이다. 오자나 탈자가 눈에 띄지 않고 문장 구성이 문법에 합당하게 짜인, 교육받은 지식층이 작성했을 법한 글이다. 펜촉이 덜 길든 탓인지 잉크 흐름이 균일하지 않아서 더러 진하기가 들쭉날쭉하다. 그래서 더욱 생생한 느낌을 준다. 젊은 여성 특유의 아담하고 단정한 맛이 느껴지는 필적이다. 역사 속 그를 직접 만나는 느낌마저 든다.

 

박헌영·주세죽에 대한 코민테른 신망

이 문서는 연구자의 관심을 끈다. 왜냐하면 역사학자들이 여태까지 활용할 수 있었던 주세죽의 정보는 주로 타자가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자라기보다는 적대자라고 해야 더 적절하겠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나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심문관이 남긴 문답록 따위였다. 그에게서 ‘범죄’ 혐의를 이끌어내려는 목적의식을 가진 자들이 생산한 기록이었다. 따라서 거기에서는 주세죽 삶의 진면목을 드러낸다든가 내면세계의 진정성을 밝힌다는 등의 목표는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맥락이 단절된 단편적인 정보가 나열되어 있기 일쑤다. 이런 자료에만 의존한다면 아무리 주의 깊게 사료 비판을 하더라도, 메마르고 엉뚱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당사자가 자기 의지로 작성한 기록이 나타났다. 이 문서는 1930년 3월24일에 쓴 것이다. 주세죽이 모스크바에서 살던 때였다. 나이 30살, 젊고 활동적이며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1929년 2월에 입학했으니 이제 2학년이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남편 박헌영은 국제레닌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아이도 있었다. 세 살 난 어린 딸 박영(朴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성장하는 만큼 ‘비비안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불렀다.

젊은 부부가 다닌 두 대학교는 코민테른이 경영하는, 세계 여러 나라 혁명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주세죽이 다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식민지 약소민족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조선학부가 내부에 설치되어 있었다. 1929년 현재 조선인 재학생은 38명이었다.② 그에 비해 국제레닌대학은 코민테른 비서부가 직영하는 최상급 간부를 위한 학교였다. 입학 자격은 매우 엄격했다. 각국 공산당의 지도적 지위에 있는 간부들만 입학할 수 있었다. 또 일정한 이론 능력과 언어 구사 능력이 필요했다. 조선인으로서 이 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1920~30년대에 박헌영을 포함해 6명에 불과했다.

어느 대학이든 입학이 허용된 사람들에게는 재학 동안 기숙사, 장학금, 의복, 음식 등이 제공됐다. 박헌영과 주세죽이 코민테른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숙소와 생활비를 받고, 양질의 고등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다. 그뿐인가. 그들에 대한 코민테른의 신망도 두터웠다. 모스크바 시절이 두 사람에게는 황금기였다.

그런데 왜 자필 이력서를 썼을까. 부족함이 없을 것만 같은데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글을 썼을까? 이 의문은 문서 끝부분을 보면 풀린다. 조선공산당에서 소련공산당으로 당적을 이전하는 수속을 밟기 위해서였다. 그는 3주 전에 당적 이전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력서는 그것을 위한 서류였다.

당적을 옮기는 것은 모스크바에 살아야 하는 조선공산당원으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였다. ‘코민테른 규약’에 따르면, “거주지를 변경한 공산주의자는 이주한 나라의 지부에 가입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③ 그것은 국제주의자의 의무였을 뿐 아니라 모스크바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도 유리했다. 모든 공적 활동에서 객체가 아니라 한 주체로서 참여할 자격과 권한을 얻는 것을 의미했다.

 

눈물 많은 청순가련형 여인?

일본 경찰 기록에 따르면 주세죽은 수동적인 여성이었다. 1925년 11월 말에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됐을 때다. 신문 조서에 따르면 그는 사회주의를 깊이 연구한 적이 없고, 교육 수준이 낮아서 그 내용을 잘 모르며, 사상운동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여성이었다. 1925년 4월에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 참석한 이유는 자기 집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서울 훈정동에 있는 자기 살림집에서 십수 명의 장정들이 모여서 뭔가를 협의했지만, 주세죽은 논의 내용을 잘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 집의 안주인으로서 손님 대접을 위해 식사 준비를 했을 뿐이지 비밀결사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④ 피의자들은 엄격히 격리됐을 터였다.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을 텐데도 박헌영은 자기 아내와 같은 기조로 진술했다. 창립대회 장소로 사용된 자기네 거처는 단칸방이었음을 환기했다. 따라서 아내는 저녁밥을 준비하느라 회의장에 출입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여성동우회를 대표해 그 회합에 참여했다는 의심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언론에 보도되던 주세죽의 이미지는 청순가련형이었다. 박헌영이 1926년 7월21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될 때였다. 포승줄에 묶인 채 서울로 압송되는 박헌영의 동정은 언론기관의 주목을 받았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신촌역에서 내리는 공산당사건 피고인들을 잠시라도 만나보려고 7~8명의 지인들이 역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속에는 주세죽도 있었다. 그는 “눈물 머금은 얼굴로 그리운 남편과 말 한마디 못하고 섰는 정경”을 보였는데, “그야말로 비감한 무언극의 일 장면”과 같았다고 한다.⑤

1927년 9월20일 공산당 재판 제4회 공판 때였다. 고문에 항의하는 소란 행위로 피고 박헌영이 공판정 밖으로 끌려나왔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지방법원 구내에 와 서 있던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 여사가 이것을 보고, 어찌된 까닭인지 몰라 눈에 눈물을 머금고 이리저리 헤매”었다. 이 정경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밑도 모를 눈물을 재촉”했다고 한다.⑥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며 눈물을 잘 흘리는 청순가련한 여인! 타자의 기록에 보이는 주세죽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주세죽이 스스로 작성한 기록에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담겨 있다.

 

진보적 사회의식 지닌 독립적 여성

그는 혁명가였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3·1운동이 첫 경험이었다. 운동이 고조되던 때 함흥에서 비밀결사 ‘애국부인회’를 조직했고, 만세시위운동에도 참가했다. 그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돼 2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애국부인회가 주목된다.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도시에서도 비밀리에 조직됐으며, 만세 시위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는 증언이 흥미롭다.

이미 보았듯이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단체에 가입한 것은 1921년 망명지 상해에서였다. 그해 6월 상해 고려공산청년회(고려공청)에 입회했고, 11월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그는 열성적인 사회주의자가 됐다. 한시도 사회주의 단체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1923년 국내로 귀환한 뒤에는 함흥에서 비밀리에 공산청년회 세포 단체를 만들었고, 공개 사상단체인 ‘칠칠회’(七七會) 활동에도 관여했다. 1925년 4월에는 고려공청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여성동우회 내부의 비밀 세포 단체를 대표하는 자격이었다. 대회가 끝난 뒤에는 고려공청 서울지방간부 위원에 피선됐고, 제2선 지도부인 중앙후보위원 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그해 5월에는 인천 정미 여공들을 조직화할 목적으로 인천에 출장을 갔다. 거기서 비밀리에 공청 세포 단체를 결성했다.

그는 여성운동가였다. 3·1운동기에 이미 여성 비밀단체인 ‘애국부인회’에 참여한데다가, 1924년 5월 사회주의 계열 공개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 결성을 주도하고 그 7인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성동우회 내부에 은밀하게 공산주의 세포단체를 조직했다. 이듬해에는 서울 지역의 대중적인 여성단체를 만들기 위해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이처럼 주세죽의 글에는 진보적인 사회의식을 지닌 독립적인 젊은 여성의 삶이 묘사되어 있다.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이미지와는 양립할 수 없는 인간상이다. 눈물 머금은 청순가련한 이미지는 그의 겉모습에 취한 착시의 소산이었다. 그의 내면에는 억눌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정신이 활활 불타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문학·예술 방면에서 주세죽의 삶을 형상화하려는 이들은 마땅히 이 기록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진면목을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기록은 사료적 값어치가 높다. 그동안 곡해돼온 사실을 정정할 가능성을 준다.

 

이춘, 이정 그리고 이준

맺음말 삼아, 보기를 하나 들어보자. 박헌영이 러시아에서 사용한 가명이 있다. ‘Ли Чун’(리춘)이 그것이다. 영문으로는 ‘Lee Chun’으로 표기됐다. 박헌영은 모스크바 시절 줄곧 이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가명의 한글과 한자 표기가 무엇인지는 밝히기 어려웠다. 영문과 러시아어 표기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잠정적으로 ‘이춘’이라 읽기로 결정했다.⑦ 음가 그대로 옮겼던 것이다. 뒷날 상해에서 발간한 비합법 출판물 <콤무니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박헌영은 ‘이정’(爾丁)이라는 필명을 쓴 바 있다. 그 때문에 ‘Ли Чун (Lee Chun)’이란 ‘이정’과 동의어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는 연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시절 박헌영의 가명이 ‘이춘’이나 ‘이정’이라고 보는 견해는 모두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주세죽 이력서에 기재된 정보가 그를 정정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자신의 남편을 일관되게 ‘리준’으로 부르고 있다. ‘Ли Чун (Lee Chun)’이란 곧 ‘리준’이라는 이름의 음차 표기였던 것이다. 두음법칙을 적용한다면 박헌영이 모스크바에서 사용한 가명은 ‘이준’이었다고 확정해도 좋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① Кореева, ‘이력서’ , 1930.3.24,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80 л.6-9об

②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특별과(спецсектор) 조선인 학생 명단’ , РГАСПИ ф.532 оп.1 д.424, л.22об

③ ‘공산주의인터내셔널 규약’ 1928.8.29, <코민테른 자료선집> 1, 동녘, 1989, 72쪽

④ 신의주경찰서 도경부보 茅根龍夫, ‘피의자신문조서(주세죽)’ , 1925.12.4: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편> 1

⑤ ‘캄캄한 밤중에 無言劇의 一場面’, <동아일보> 1926.7.23

⑥ ‘30여 경관 총출동’ , <동아일보> 1927.9.21

⑦ ‘주세죽 관계 자료’ <역사비평> 1997년 여름호,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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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mai 2016 1 16 /05 /mai /2016 18:13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입력2016-05-16 20:37:00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오월 광주 치유사진전’이 16일 서울시청 지하 시민청 갤러리에서 개막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들이 기억 속 깊이 박힌 고통과 아픔의 현장을 찾아 촬영한 사진을 전시합니다. 고문이나 폭행, 죽음이 일어난 현장들입니다. 그들에게 30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정신적 상처를 안기는 장소들이죠. 유공자들은 그 현장을 피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사진 촬영은 당시 기억과 직접 대면하면서 스스로 치유의 힘을 회복하려는 행위입니다. 전시 주제는‘기억의 회복’입니다. 5·18 유공자 7명이 촬영한 사진 100여점을 선보입니다. 이들 작가와 대표 작품을 소개합니다. 광주트라우마센터로부터 전시 자료를 받아 발췌해 싣습니다. 전시는 23일까지.

 

■곽희성 1959년 12월 생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80년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하던 중 머리에 총을 맞고 죽어가는 고등학생을 차에 싣고 병원까지 수송하면서 제발 살아만 달라며 기도했던 기억을 아프게 가지고 있다. 주기적으로 악몽을 꾸는 등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자책감으로 힘들 때가 많다.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5·18자유공원 상무대 영창 | 세월에 억눌린 분노는 쇠창살 같은 억압과 구속의 표상들을 찾아헤매게 했고 그 강제적 실체들과의 조우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흔들렸던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박갑수 1953년 5월 생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80년 당시 직장이었던 동아 제재소에서 총무를 맡고 있었다. 계엄군의 지나친 진압작전에 분개하여 맨손으로 싸우는 학생들을 제재소 마당에 불러 모아 시위에 쓸 각목을 나눠주었다. 계엄군들의 구타와 당시의 잔혹한 상황에 대해 기억하고 말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5·18자유공원 상무대 영창 | 저 고무신을 신고 공포에 떨었을 동지들을 떠올리며 떨리는 가슴을 애써 눌러야만 했다.
 

“너무 마음이 자꾸 울적허더라구. 그래서 한 카트 찍어봤지.”

 

■서정열 1962년 6월 생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으로 시민군에 참여했다. 항쟁기간 막바지에 고등학생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권유를 받고 도청을 나왔으나 28일 체포되어 31사단으로 끌려가 구타 등 심한 고문을 당했다. 반복되는 기억과 울분,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구 전남도청(현 아시아문화의전당) | 투쟁의 상징이었던 공간은 점차 희석되어가고 있다. 그 아쉬움 탓에 구 전남도청의 안과 밖을 지속적으로 마주하면서 당시의 기억들을 현재화시키는 중이다. 36년 세월의 흐름을 되살리기 위한 회복의 과정인 것이다.

 

■양동남 1961년 1월 생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80년 5월 가톨릭센터 앞에서 리어카에 실려 있는 시신을 보고 시위에 참여 했다.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 총을 가져와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기동타격대로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27일 새벽 계엄군에게 체포되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모진 고문으로 심한 부상을 당해 국군통합병원에 후송, 70여일간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이후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국군통합병원 병상이 있던 자리 | 폐허가 된 채 사람의 흔적 하나 없는 이 공간에서 처절하게 무너졌던 당시의 자존감을 떠올렸다. 당시 93세였던 할머니는 “저 아그가 차가운 디 있는디 내가 어케 따순 밥을 먹겄냐”고 하셨다는 얘기를 나중에야 들을 수 있었다.

 

■이무현 1957년 5월 생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80년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하여 29일 검거 되었고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고문 수사를 받았다. 1981년 4월 3일 석방되었으나 한달 만에 나주 화약고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 1984년 5월 구 도청 앞 분수대에서 진상규명을 외치며 분신을 시도해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2년여 입원치료를 했으나 아직도 완치되지 않았다.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으로 10여 년간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하고 지난해 10월 퇴원해 현재 건강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아시아문화의 전당 (구 전남도청)/ 5·18자유공원 군사법정 | 진실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곤봉과 군홧발에 짓이겨져도 날아오는 총알에 두려워도 피하지 않고 맞서 버티고 매달렸다. 원하는 것은 진실 하나 뿐이었고 그래서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끝까지.

 

■이성전 1949년 9월 생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80년 당시 시민들이 공수부대에 의해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느껴 투쟁에 참여했다. 7월 1일 연행되어 화순경찰서에서 한 달여 동안 하루에 대여섯 차례씩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후 505보안대,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고문수사를 당하고 구속수감 되었다. 출소 후 거리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투쟁을 지속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등 합병증으로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505 보안대 고문실 | 36년 째 멈추지 않는 좌절과 고통의 시간. 가정조차 팽개치고 오로지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민주화 투쟁의 대열에 나서야만 했다. 내게 물을 먹이고 사지를 비틀어대던 그들이 있던 자리에 서서 내 부서진 몸이라도 벌떡 일으켜 보려했다.

 

■이행용 1954년 7월 생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80년 당시 운영 중인 석재공장에 계엄군이 주둔한 것에 분노해 시민군에 참여했다. 27일 이후 일상생활을 하던 중 수배된 사실을 알고 몇 년 동안 도피생활을 하다 체포되었다. 총을 내놓으라며 고문 수사를 받고 60여일 만에 풀려났는데, 물고문과 고춧가루 고문이 가장 힘들었다. 현재 광주 전역에 있는 5·18사적지를 관리하고 있다.

[기타뉴스]아픈 기억, 그래도 회복한다

5·18자유공원 마당 | 그들은 높고 나는 낮았다. 높은 하늘은 한없이 푸르렀고 트럭 바닥은 매섭게 시리고 차가웠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 바닥이 아니어야 했다. 짓밟히고 무너져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어야만 했다. 어느 누구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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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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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ovembre 2012 4 01 /11 /novembre /2012 11:04
cha_kwang_su.jpg(평양 10월 30일발 조선중앙통신)혁명투사 차광수 서거 80돐 중앙추모회가 30일 평양에서 진행되였다.


차광수는 주체형의 첫 혁명조직인 타도제국주의동맹과 조선로동당의 시원으로 되는 첫 당조직-건설동지사의 핵심성원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참모장의 중책을 지니고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작전적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싸우다 1932년 10월 30일 돈화(중국)의 격전장에서 스물일곱살의 젊은 나이에 최후를 마쳤다.


추모회에는 김영남, 김기남, 최태복, 김원홍, 오극렬, 문경덕, 리병삼과 당, 무력, 정권기관, 사회단체, 성, 중앙기관 일군들, 조선인민군, 조선인민내무군 장병들, 로력혁신자들, 유가족들, 평양시내 근로자들이 참가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며 당중앙위원회 비서인 김기남은 추모사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투사는 조선혁명의 려명기에 수령중심의 통일단결의 새 력사를 개척하는데서 핵심적역할을 수행한 견결한 한별옹위투사였다.


특출한 위인상을 지니신 김일성동지께 인간적으로, 사상적으로 완전히 매혹된 그는 수령님을 단결의 중심으로 모시고 끝까지 따르는 길에 조선혁명의 창창한 미래가 있으며 혁명전사의 참된 삶도 있다는것을 신념으로 간직하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그것을 지켜 목숨바쳐 싸웠다.


그는 김일성동지의 총대중시사상과 로선을 받들고 주체적인 혁명무력건설과 선군위업개척에 공헌을 한 수령님의 첫 총대동지였다.


그는 김일성동지께서 지니신 숭고한 인민관을 따라배워 언제 어디서나 수령님식대로 사업하고 생활한 참된 혁명가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세심한 지도밑에 쟁쟁한 혁명가로 성장한 그는 조직관념이 남달리 높았으며 어떤 정황속에서도 절대로 혁명적원칙을 양보하거나 제정된 제도와 질서를 흥정하는 일이 없이 모든것을 수령님의 의도와 결론에 따라 처리해나가군 하였다.


투사가 오늘도 조선로동당과 조국, 인민의 기억속에 불굴의 한별옹위투사, 열혈충신으로 영생하고있는것은 전적으로 백두산절세위인들의 높은 정치적신임과 뜨거운 동지적사랑, 고매한 혁명적의리가 있었기때문이다.


혁명선렬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숭고한 전우관, 동지관을 지니신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에 의하여 끊임없이 이어지고있다.


추모사는 조선혁명의 려명기에 수령중심의 통일단결의 시원을 열어놓고 조국의 해방과 주체혁명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청춘도 생명도 다 바쳐싸운 차광수를 비롯한 항일혁명선렬들의 고결한 혁명생애와 투쟁업적은 조선혁명의 승리적전진과 더불어 영원히 빛날것이라고 강조하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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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août 2012 7 26 /08 /août /2012 13:43
(평양 8월 24일발 조선중앙통신)1945년 8월 24일 일제는 해방의 기쁨을 안고 귀향길에 오른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태운 일본해군수송선 《우끼시마마루》를 바다에서 폭침시키는 야수적살인만행을 감행하였다.

일본당국은 이 사건이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의하여 우발적으로 일어난 불가피한 사고였다고 발표하였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였다.

당시 일본당국자들은 조선사람들을 고향에 보내준다고 하면서 조선으로 가는 배편은 이것밖에 없다고 회유절반, 강박절반으로 강제로 배에 태웠다.

정원을 훨씬 초과하는 수천명을 태운 《우끼시마마루》는 오미나또항을 떠났다.

 

일본인들을 포함한 여러 증언자들의 말에 의하면 배는 처음부터 조선의 부산이 목표가 아니라 폭침장소인 일본 마이즈루항 앞바다로 항로를 정하였었다.

조선예술영화 《살아있는 령혼들》에서 보여주는것처럼 배가 일본의 서부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가 마이즈루항가까이에 이르러 키를 돌린것은 물을 실으려고 한것이 아니였다.

배에는 부산까지 가는데 필요한 연료가 턱없이 부족하였는데 이것은 애당초 그곳으로 갈 계획이 아니였다는것을 말해준다.

폭발직전에 배에 있던 일본인들이 서둘러 뽀트를 타고 달아난것도 폭침흉계를 사전에 통보받았기때문이였다.

일제가 이 사건을 《기뢰에 의한 폭침》으로 주장하는것도 과학성과 객관성이 무시된 뻔뻔스러운 사기극에 불과하다.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폭발시 반드시 있어야 할 물기둥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하였으며 더우기 기뢰는 한번밖에 폭발하지 않는데 배에서는 여러번의 련속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사실들은 이것이 사전에 일제가 면밀히 계획하고 실행한 조직적인 조선인대집단살인사건이라는것을 증명해주고있다.

이역의 검푸른 바다에서 한을 품고 숨진 조선인령혼들은 오늘도 살인악마 일제를 천백배로 복수해달라고 부르짖고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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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octobre 2010 5 22 /10 /octobre /2010 09:12

(평양 10월 21일발 조선중앙통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인민무력부장 김영춘이 21일 중국인민지원군 조선전선참전 60돐에 즈음하여 조선을 방문하고있는 중국인민해방군 전 공군사령원 왕해를 단장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 로병대표단을 만나 담화를 하였다.

 

*

 

중국인민지원군 조선전선참전 60돐에 즈음하여 조선을 방문하고있는 중국인민해방군 전 공군사령원 왕해를 단장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 로병대표단이 21일 대성산혁명렬사릉에 화환을 진정하였다. 대표단성원들은 혁명렬사릉에 화환을 진정하고 경애하는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김정일동지의 령도따라 조국의 해방과 부강번영,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한생을 바쳐싸운 혁명렬사들을 추모하여 묵상하였다. 손님들은 이어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동상에 꽃다발들을 진정하였다.

 

*

 

중국인민지원군 조선전선참전 60돐기념 사진전시회가 21일 평양대외문화교류쎈터에서 개막되였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모택동주석을 비롯한 중국의 로세대혁명가들, 존경하는 호금도동지와 함께 조중 친선관계발전을 위하여 진행하신 활동을 수록한 사진문헌들과 조중친선의 력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개막식장에 전시되여있다.

 

개막식에는 조중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최창식보건상, 전영진 대외문화련락위원회 부위원장, 관계부문 일군들, 시내 근로자들과 류홍재 주조 중화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 대사관성원들이 참가하였다.

 

개막식에서는 연설들이 있었다.

최창식은 중국당과 정부가 조선인민의 영웅적투쟁을 지원함으로써 전쟁승리를 이룩하는데 기여하였다고 하면서 청춘도 생명도 서슴없이 바친 중국인민지원군렬사들에게 숭고한 경의를 표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사진전시회가 두 나라 인민들사이의 전통적인 친선협조관계를 더욱강화하는데 이바지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

 

류홍재는 항미원조는 세계 반침략전쟁력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겼다고 하면서 피로써 맺어진 중조친선이 두 나라 령도자들의 관심속에 더욱 강화발전되고있는데 대하여 언급하였다.

 

조선동지들과 함께 자기들은 로세대혁명가들께서 마련하여주신 전통적인 중조친선협조관계의 아름다운 미래를 개척해나갈것이라고 그는 강조하였다.

개막식이 끝난 다음 참가자들은 전시된 사진들을 돌아보았다.

 

*

 

중국인민지원군 조선전선참전 60돐기념 중국영화상영주간이 개막되였다.

개막식이 21일 대동문영화관에서 진행되였다.

 

개막식에는 홍광순 국가영화위원회 위원장, 관계부문 일군들, 영화부문 창작가, 예술인들, 류홍재 주조 중화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와 대사관성원들, 조선에 체류하고있는 중국손님들이 참가하였다.

 

개막식에서는 연설들이 있었다.

 

홍광순은 중국인민지원군용사들이 항미원조보가위국의 기치밑에 공동의 원쑤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국제주의정신을 발휘한데 대하여 언급하고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 중국의 로세대혁명가들과 함께 마련하여주신 전통적인 조중친선관계는 두 나라 최고 령도자들의 깊은 관심속에 더욱 공고발전되고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두 나라 영화부문 창작가, 예술인들이 교류활동을 적극 벌려나감으로써 조중친선을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하리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

 

류홍재는 60년전 중국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조선전선에 달려나와 조선인민과 함께 피어린 투쟁을 벌린데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는 조선동지들과 함께 자기들은 중조친선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영화예술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협조를 강화할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참가자들은 중국예술영화 《상감령》을 감상하였다.

*

 

중국인민지원군 조선전선참전 60돐에 즈음하여 조선을 방문하고 있는 중국인민해방군 문예단이 21일 동평양대극장에서 첫 공연의 막을 올렸다.

조선인민군 장령, 군관들, 군대예술단체들의 창작가, 예술인들과 중국인민해방군 문예단 단장을 비롯한 지휘성원들이 공연을 관람하였다.

 

출연자들은 취주악 《조선인민군가》, 《중국인민지원군 조선전선참전 가요련곡》등의 종목들을 무대에 올렸다.

 

 그들은 풍부한 성량과 세련된 연주,째인 안삼불로 두 나라 군대들의 불패의 위용과 숭고한 국제주의의 모범을 보여준 중국인민지원군용사들의 영웅적투쟁을 감명깊게 형상하였다.

조선노래들인 녀성독창《김정일화》, 《끝없는 이 행복 노래부르네》를 비롯한 곡목들은 장내를 절세위인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에 휩싸이게 하였다

 

불멸의 혁명송가들인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김정일장군의 노래》는 관람자들로 하여금 위대한 수령님을 주체의 영원한 태양으로 모시고 경애하는 장군님의 령도따라 강성대국건설위업을 빛나게 실현해가는 크나큰 긍지와 자부심을 더욱 가슴깊이 간직하게 하였다.

사상예술성이 높은 공연은 관람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공연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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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septembre 2010 7 05 /09 /septembre /2010 09:51

 

koguryo_tombe_pyongyang.jpg(평양 9월 3일발 조선중앙통신)최근 조선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사들이 평양시 락랑구역 동산동일대에서 4세기말~5세기초의것으로 인정되는 독특한 형식의 고구려벽화무덤을 발굴하였다.

 

길이 12.8m, 너비 2~2.4m로 북남으로 길게 놓인 돌칸흙무덤에는 안길, 앞칸과 좌우의 두 곁칸, 사이길, 안칸 등이 있다.

 

앞칸은 길이 240cm, 너비 210cm, 높이 330cm이고 두 곁칸의 크기는 각각 길이 80cm, 너비 72cm, 높이 115cm이며 천정들은 궁륭삼각고임, 평행삼각고임형식으로 되여있다.

 

무덤에서는 세사람분의 뼈와 순금으로 만든 꽃잎형, 반구형장식품, 원형은장식품, 톱날형금동장식품들과 관못, 도기류, 사자모양의 청자기와 청동화페류 등이 발굴되였다.

 

안길량벽에는 행렬도, 앞칸과 사이길, 안칸벽들에는 붉은 기둥과 문지기장수, 여러가지 무늬들이 부각되여있다.

 

행렬도의 웃부분에는 5명의 인물과 4필의 말이 그려져있고 가운데부분에는 철갑을 씌운 말의 몸통과 다리가 있으며 그 우에는 사람의 머리가 약간 보인다.

 

아래부분에는 검은 머리수건을 쓰고 긴 창같은것을 들고가는 사람들이 형상되여있다.

 

안길서쪽벽에는 수레바퀴와 말을 탄 사람이 있는데 관모를 쓴 그의 눈과 코수염, 말갈기가 아주 생동하다.

 

무덤칸우에 석회와 숯, 진흙을 엇바꾸어 다지면서 봉분을 쌓은것은 다른 무덤들에서 볼수 없던 특이한것이다.

 

이 무덤은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벽화무덤들가운데서 비교적 규모가 크고 구조형식이 독특하다.(끝) 

 

Kyodo News, KC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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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mars 2010 5 26 /03 /mars /2010 00:58

ahn jeung geun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추모행사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는 오늘(25일)부터 사흘동안 중국 뤼순 일대 안 의사 관련 유적지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남북한 공동 추모 행사'를 개최합니다.

이번 행사에는 남북한 종교계 관계자 백30여 명이 참석해 공동 미사를 보고 안 의사의 평화정신을 주제로 토론회를 엽니다.

천주교도 안의사 순국일인 내일(26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안의사 사후 처음으로 정진석 추기경의 집전으로 공식 추모미사를 봉헌합니다.

정 추기경은 미사 강론을 통해 세계 평화를 꿈꾼 안의사의 숭고한 정신과 신앙을 기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밖에 동북아역사학술재단도 내일 '안중근 연구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학술행사를 여는 등 각계의 추모행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KB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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